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엘비스 프레슬리 (문단 편집) == 생애 == 엘비스 프레슬리는 [[1950년대]] 초반부터 [[기타]]를 배우면서 가수의 꿈을 키우고 있었는데, 당시 그와 함께 음악적 교류를 하던 사람들이 브루넷츠 형제[* 이들은 후에 조니 브루넷 트리오로 이어진다.]였다. 사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이미 이 시기부터 여러 [[밴드]]나 가수 경연대회에 수차례 응모했다 떨어진 전적이 있었으며, 새로운 멤버를 구하는 기성 밴드들의 오디션에 응모했다가 떨어진 일도 비일비재했다. 당시부터 이미 여러 실패를 경험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앨비스는 트럭 운전수 일을 하며 꾸준히 [[오디션]]에 참가했다. 처음으로 어머니를 위해 제작한 레코드판은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심리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해 자작판이라도 만들어 선물하자는 결심으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MfrC8PAQtlg)]}}}|| || {{{#white '''엘비스 프레슬리 - Jailhouse Rock'''[*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엉덩이를 흔드는 춤을 볼 수 있다.]}}} || [[1956년]] [[1월]], RCA Victor 레코드사에서 싱글 〈Heartbreak Hotel〉을 발매하며 공식적으로 데뷔했고, 데뷔 직후부터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하반신을 흥겹게 흔드는 당시로는 아주 파격적인 춤과, 흑인들의 전유물로 취급되던 [[로큰롤]]을 선보여 미국을 뒤흔들었고, 보수적인 기성세대들에게 혐오를 받았으나[* [[로큰롤]]이란, 명칭부터가 한국어로 치면 [[떡치기]] 정도에 해당하는 속어로 통용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1950년대]] 중반 TV 공연 영상들 상당수가 부자연스럽게 상반부만 보여서 몸을 흔드는데, 당시 검열이 엄격하던 [[미국]]에서는 하반신을 흔들면서 춤추는 행위를 외설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흑인 음악과 퍼포먼스를 선보인 최초의 백인 아티스트인 셈. <[[포레스트 검프]]> 영화판에서도 나오는데 시내의 TV가게에서 엘비스가 무대에서 춤을 추면서 [[Hound Dog]]를 부르는 장면이 TV에 방영되자 포레스트의 어머니가 어린 포레스트의 눈을 가리면서 "저건 아이들 보는게 아니야." 라고 말하며 급히 떠나는 장면도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JslCsekjIg|##]]. [[https://www.youtube.com/watch?v=sGZm7EOamWk|에드 설리번 쇼에서 보여준 다리 흔들기]].], 젊은 층에게는 인기가 대단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lvis Presley Draft Card.jpg|width=100%]]}}} || || {{{#ffffff '''엘비스 프레슬리의 징병통지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lvis Presley 1202.jpg|width=100%]]}}} || || {{{#ffffff '''첫 소집에서의 모습'''}}} || 당시 미국은 [[징병제/미국|'''징병제'''를 시행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병역의무가 부과]]되어 [[1958년]]에 입대했다. 주 서독 [[미합중국 육군|미 육군]]에서 복무를 했는데,[* 최종계급은 [[부사관|Sergeant]]이다. 국방부 정식 번역으로는 [[병장]]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하사]]에 대응되는 계급이다. 의무복무 기간 중에 이루어진 특진의 연속으로 얻은 계급인데, 당시 대부분의 징집병들이 일병이나 상병([[준부사관]])이 실질적인 진급 상한선이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국방부의 [[높으신 분들]]도 엘비스 프레슬리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수많은 여성팬들이 엘비스 프레슬리를 보기 위해 서독을 방문했다. 복무 당시 독일 민요 [[노래는 즐겁다|Muss i denn, muss i denn zum Städtele hinaus(노래는 즐겁다)]]를 '[[https://youtu.be/X02t8vKLtbw|Wooden Heart]](목석같은 마음)' 라는 곡으로 개사해 부른 것이 유명하다. 이 곡은 엘비스가 출연한 영화 G.I.블루스에 삽입되었다. 이 때, 그가 입던 군복은 지금도 잘 보관되어 있는데, 나중에 경매로 팔려 다름아닌 [[이란]] [[팔라비 왕조]] 후손들이 [[미국]]에서 경매로 사서 지금도 소유 중이다. 영화도 많이 찍었다. 데뷔한지 몇 개월 후인 [[1956년]] [[11월]], <러브 미 텐더>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은막에 데뷔했고, 이후 잠깐 사랑에 빠졌던 [[앤 마그렛]]이 여주인공으로 같이 나온 (1964)에서부터 다큐멘터리 (1972)까지 총 3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바 있다. 10년 동안 30편의 영화를 찍었으니 매년 3편을 공장식으로 찍은 것이다. 거의 다 엘비스의 노래 선전용 90분 짜리 뮤직비디오에 가깝다. 히트곡을 영화화했거나 영화에 나온 노래가 히트하는 식인 것이 많아 배우로서의 평가는 좋지 않다. 그럼에도 워낙 인기가 좋아 그가 나온다 하면 극장으로 소녀 팬들이 몰려들어 영화는 계속 찍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엘비스가 주연으로 나오고 주제가도 부른 <블루 하와이>가 [[1961년]]에 개봉했던 바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4RDHDdv7464)]}}}|| || {{{#white ''''''(1962)[*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엉덩이를 흔드는 춤을 볼 수 있다.]}}} || 그래도 [[1960년]]작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24874|플레이밍 스타]]는 작품성이나 연기력 모두 준수한 평가를 받았다. 백인 아버지와 인디언 어머니를 둔 혼혈 청년이 백인과 인디언의 충돌이 격해지자 그 가운데서 선택을 강요받고 피해받는 모습이 잘 그려졌고, 노래로 도배하다시피 한 다른 작품과 달리 노래씬도 최소화하면서 영화 자체에 집중했다.[* 엘비스 본인도 외가쪽에 체로키족 피가 흐른다. 이 영화 감독은 할리우드 B 무비 명장으로 불리는 [[돈 시겔]]이다.] [[1970년대]]에도 엘비스의 인기는 여전했으며, [[1973년]] [[하와이]] 콘서트는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으로 생중계된 공연이 되기도 하였다.[[https://en.wikipedia.org/wiki/Aloha_from_Hawaii_Via_Satellite|#]] 하지만 엘비스 프레슬리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체중이 늘기 시작했고, 약물 치료 등을 해 보았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하술할 식성 및 식습관도 당연히 연관이 있다. [[1977년]] [[1월]]엔 몸무게가 350파운드(158킬로그램)에 달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1977년]] [[8월 16일]], 엘비스 프레슬리는 미국 [[테네시]] 주의 [[멤피스(미국)|멤피스]]에서 자택의 욕조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고, 42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요절했다. 그의 사망과 관련해 여러가지 근거없는 괴담들이 난무하지만, 의학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의 사망 원인은 가족력 때문이라는 견해가 많다. 엘비스의 어머니도 심장병으로 40대의 창창한 나이로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엘비스의 외가 친척들 대부분이 심장병으로 일찍 사망했다고 한다. 엘비스의 외동딸 역시 50대 중반의 나이에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때문에 각종 괴담들은 별로 근거가 없다. 그가 약물을 투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마약류가 아니라 각성제, 수면제 등 일상적이고 가벼운 약들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변기 위에서 바지를 반쯤 벗은 채로 약을 맞다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런 사례 때문에 '''망가진 록스타'''의 전형으로 까이기도 한다. 그 밖에도 살을 빼기 위하여 손댄 게 마약이라는 소문도 있다. 그래서인지 [[로보캅]] 2를 보면 그의 사진과 그를 연상케하는 말라빠진 미이라가 잠깐 나오기도 한다. 마약밀매범들이 쾌락과 마약으로 죽은 가수라고 찬양하는 이미지. 그 덕에 [[타블로이드]] 저널리즘의 대표적인 희생양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그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어 보도되지 않지만, 아직도 많은 미국과 영국의 타블로이드들이 사생활에 대해 근거없는 루머를 생산 중이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 새로운 사망설이 제기된다. 바로 [[변비]]로 인한 죽음이다. 실제로 엘비스 사망 후 부검에서 엄청난 양의 대변[* 이 당시 엘비스의 몸무게가 150kg였는데, 부검에서 나온 대변만 20kg이 훨씬 넘었다.]이 대장에서 검출되었고, 몸무게가 갑작스럽게 불어난 이유를 근거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421&aid=0002171376|이 사망설에 의하면 엘비스는 대변을 보지 못해 힘겨워했고]] 항상 [[대변]]이 마려운 그 상태가 멈추지 않은 상태로 살아야 하는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 주치의는 엘비스에게 항문 이식 수술을 권유하였으나, 엘비스는 연예인 신분인 자신이 항문 이식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에 일어날 후폭풍을 견디지 못해 자꾸만 수술을 미루다가 계속 쌓이는 대변의 독성에 점점 더 중독되었다는 설이다. 또한, 약물 과다 복용[* 불법 마약이 아닌 각성제, 진통제와 같은 치료 목적의 약물을 말하며, 엘비스는 말년에 거의 암말기 환자와 맞먹을 정도의 약물을 사용했다.] 역시 그의 심장마비를 부추겼을 수도 있다고 한다. 위에서 나온 주치의 역시 이를 인정하였으나, 이러한 처방은 엘비스를 마약에 손을 안 대도록 하기 위한 선택이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https://www.practicalpainmanagement.com/pain/other/brain-injury/elvis-presley-head-trauma-autoimmunity-pain-early-death|포레스트 터넌트 박사는 처방보다 10배 더 투여된 [[코데인]] 역시 약리학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그 10배에 달하는 코데인 또한 치사량에 미치지 못한다는 판정이 났다. 그런데 코데인은 변비를 유발한다. 설사 치료제로 과거에는 코데인이 자주 처방되었다. 그리고 엘비스의 부검 당시, 많은 약물의 성분이 나온 건 맞지만 그 중에서 불법성 마약이나 알코올은 일절 나오지 않은 것 역시 주목할 만한데, 이는 엘비스가 말년까지도 마약이나 술에 쩔어 사는 방탕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주기도 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Forbes%27_list_of_the_world%27s_highest-paid_dead_celebrities|사망한 지 50년이 다 됐음에도 아직도 현역 가수 못지않은 수익을 벌고 있다. [[포브스]] 사후 수익 순위를 집계한 2001년 이래로 한 번도 순위권에 빠진 적이 없으며 [[마이클 잭슨]] 사망 전까진 1위를 도맡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